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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TL 101

<픽션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1. 먼저 지난 수업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써 주세요. 질문은 과학과 인문학, 기술의 윤리학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 담긴 한 문장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수업 불참자는 안 쓰셔도 되겠습니다.

 

 과학은 기술발전을 통해 사람들이 더 편리한 삶을 살게 하고, 인문학은 기술의 윤리학을 통해 과학이 윤리적 문제를 무시하고 비인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 이처럼 과학과 인문학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며 상호보완적으로, 둘 다 사람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2.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대해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써 주세요.

 

1) 틀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혹은 가리키는가)?

 

 틀뢴은 우크바르의 환상적인 지역이다. 현실에서 실존하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는 백과사전을 뒤져가며 우크바르가 언급된 부분을 찾는 것을 실패한 이후, 술집에서 틀뢴 제1 백과사전을 발견하고 이 알려지지 않으며 허상의 행성에 관해 읽게 된다. 질서가 완벽하게 분명하고 조화로운 틀뢴은 정돈된 우주의 성격을 광범위하고도 자세히 보여 준다. 공간이 아닌 시간 속에서 계속적으로 전개되는 일련을 과정을 우주로 보며, 어떤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기도 하고, 모든 학문은 심리학의 아래라고 보는 등 현실과는 다른 체계를 가진다. 문학도 작가는 영원하고 익명이라는 생각에 저자명이 명시되어있지 않았고, 모든 변형을 포함한 단 하나의 줄거리로 이루어져있으며 A가 있으면 반대되는 B를 적어둬야 한다. 이처럼 인간의 관념론이 만든 틀뢴은 인간의 지성과 상상력에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인간이 해석할 수 있도록 운명 지어진 미로라고 할 수 있다.

 

2)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무엇이 다른가?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모든 단어와 모든 행이 완전히 일치했다. 독자가 그냥 읽었을 때는 내용이 서로 다를 바 없이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메나르가 <돈키호테>를 쓰려고 심혈을 기울인 만큼 그들은 달랐다. 세르반테스가 17세기 초에 <돈키호테>를 썼을 때,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고 숙명적인 작업(page 61)이었다. 기사도 소설의 허구와 초라한 시골 현실을 대립시키며 시대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고 허세만 부리는 돈키호테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며 비판하려고 한 것이었다. 20세기 초의 메나르는 그런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르반테스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교묘하게 <돈키호테>를 썼다. 그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키호테>를 접근하는 방식이 아니라 피에르 메나르의 경험을 통해 <돈키호테>에 이르도록 노력했다. 글자 그대로를 옮긴 것처럼 보이겠으나 17세기가 아니라 20세기에 걸맞는 메나르의 눈으로 <돈키호테>를 바라보고자 했다. 세르반테스와 달리 작가에 의한 창작에만 머무르지 않고, 독자에 의한 창작을 이끌어낸 것이다.

 

3) <원형의 폐허들>의 마법사와 그의 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법사는 꿈속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듣는 여러 학생들 중 한 명을 선택하지만, 꿈을 꾸지 않음으로써 선택한 학생을 잃어버린다. 억지로나마 선잠으로 학생들을 다시 끌어 모았으나 금방 흩어져서 실패한다. 그는 꿈을 이루고 있는 어지러운 재료들을 자기 입맛대로 주조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닫고 충분한 회복시간을 가진 뒤, 꿈의 아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실망하고 을 통해 꿈꾸어진 소년의 잠을 깨웠다. 이렇게 허상을 상상하며 만들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마법사는 고뇌와 창조를 거듭하는 인간을, 그리고 그의 꿈은 인간의 창조를 의미한다.

 

4) <바빌로니아의 복권>에서 '회사'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에 대한 알레고리인가?

 

 복권은 처음에 평민들이 즐기던 놀이였다. 단지 인간의 희망만 겨냥하여 초보적으로 진행된 복권은 실패했고, 복권에 당첨된 것과 반대로 뽑히면 벌금을 내야 하는 불운의 숫자를 끼워 넣으며 인기 있게 되었다. 하지만 벌금을 피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회사는 당첨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등장했다. ‘회사로 가는 길은 비밀스러웠으며 소속된 요원은 전권을 쥐고 사람들의 불만에 직접 대응하지 않으면서 비공개적인 활동을 했다. 일상생활에서도 회사는 사람들의 관습에도 영향을 미쳐 실수 몇 가지를 끼워넣고, 우연을 교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도 했다. 이런 영향력 때문에 회사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 전지전능하지만 사소한 것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 사실 존재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사람 등 다양했다. 어느 순간부터 등장하여 사람들의 삶에 지독하게 영향을 주었던 회사는 권력을 독점하는 극소수의 절대자이다.

 

5)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의 줄거리를 쓰시오.

 

 칭다오 대학의 영문학 전직 교수였던 유춘 박사는 독일의 스파이로, 같은 스파이였던 루네베르크와 같은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아 리처드 매든 대위를 피해 도망치기로 한다. 유춘은 매든의 짐작대로 영국 포병대의 정확한 위치, 즉 기밀을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독일에 있는 대장의 귀에 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리고 전화번호부에서 이 소식을 전해줄 유일한 인물과 거주지를 찾아내고는 일부러 목적지인 애시그로브보다 먼 기차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간발의 차이로 매든은 기차역에서 유춘을 놓치고, 유춘은 애시그로브에 내려 스티븐 앨버트를 만난다. 중국 음악, 중국어, 유춘에게 익숙한 요소들로 다가온 앨버트는 미로처럼 난 정원 이야기를 꺼내며 둘은 유춘의 선조 추이펀에 대해 대화한다. 추이펀의 혼란스러운 소설이 알고보니 미로였다고 말한다. 앨버트는 주기적이고 순환되는 책에서 작중 인물의 선택에 따라 몇 갈래로 미래가 갈라지지만, 언젠가 그 미로의 길들이 모이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며 추이펀은 이런 수사학적 실험을 해보기 위해 여러 판본을 찍어내며 미로를 만든 것이라고 믿는다. 해답이 장기인 수수께끼에서는 장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이라는 소설은 주제가 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추이펀은 은유나 비유를 통해 소설의 갈래길을 선택한 것이다. 분산되고 병렬되는 시간, 평행세계를 말하던 앨버트를 향해 유춘은 리볼버 권총을 쏘았고 매든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유춘은 앨버트를 죽이며 공격을 받아야 할 도시의 이름, 앨버트를 베를린에 있는 대장에게 알리는 데에 성공했다.

 

6)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를 읽고 작가와 독자, 평론가 등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쓰시오.

 

 작가가 단순히 새로운 것을 찾는 창작을 하고, 독자는 글을 읽으며 작가의 생각을 따라가며 평론가는 독자가 미처 따라가지 못했던 작가의 생각을 깊숙이 파고드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것에서 이야기가 탄생하는 창조가 아니라 위대한 문학이란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것이어야 한다는 본문처럼 원래 있던 작품에서 재생산을 통한 창작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창조를 경외시하기보다 작가가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고 본다. 작가는 무작정 새롭고 신박한 소재를 찾으러 갈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작품에서부터 나아갈 수 있음을 생각하고 다른 방향의 창조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게 창조한 작가는 생산자, 독자는 수용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둘로 나누어지는 균열을 없애고 독자 역시 독서를 통해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전까지는 그냥 작가는 작가, 독자는 독자, 서로 상호작용이 힘든 이분적인 관계로 생각했던 독서 전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다. <알타모심으로의 접근>,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평론가의 입장으로 전개되는 글로, 작가의 글에서 내가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주며 독자의 창작 활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봤다. 작가의 다른 방향의 창조를 말하듯이 평론가 역시 독자에게 다른 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3. 이 책에 대한 너무 짧지 않은 독후감을 써 주세요. 이때 독후감에는 "픽션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실재란 무엇인가?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보르헤스의 입장,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 대한 내용을 반드시 포함시켜 주세요.

 

 한국어로 번역되어있고 두껍지도 않았으나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책이었다. 책 뒤에 수록된 작품해설을 읽어도 여전히 어떤 부분에서 대다수의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우리의 새로운 문학관을 이끌었는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하지만 여러 번 본문을 읽고 찾아보며 가상과 현실, 그리고 보르헤스가 <픽션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처음보다는 알맹이를 찾아갈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엔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은 픽션과 실재 사이 경계를 흩뜨려놓는 식으로 내용이 전개되었다. 그래서 보르헤스가 생각하는 픽션과 실재라는 것을 말하기가 모호해졌는데, 보르헤스의 실재란 실재하는 것 역시 상상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이성적인 것처럼 보인 것들이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다른 허구임을 알려준다. 픽션 역시 실재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모든 것이 인간이 만든 관념론에 따라 맞게 떨어지며 허구라는 걸 알려주는데, 이 역시 인간의 지성으로 창조해낸 결과물을 말한다. 그러면서 보르헤스의 책은 고정되어있지 않고 기존에 있던 이야기를 무한하게 반복하면서도 여러 선택지가 갈리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진정한 책 한 권을 찾기 위해 A책을 찾고, A를 찾기 위해 B책을 찾는 식의 순환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책은 얼마든지 다른 책으로 변형될 수 있기에 무한하고 주기적이다.

 보르헤스와 달리 나는 픽션은 우리가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꿈꿀 수 있는 세계이며, 공상과학소설처럼 언젠가는 현실이 되고 인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실재는 말 그대로 우리가 지금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장자의 꿈과 비슷하게 지금 우리의 삶이 꿈과 같다고 해도 정작 우리에게는 현실이고 꿈속의 사람들도 우리의 눈에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믿음을 바탕으로 실재한다고 본다. 나는 보르헤스의 색다른 관점이 신기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픽션과 실재를 나누는 경계를 믿고 있다. 다만 책을 대하는 생각에서는 <픽션들>을 보며 달라진 부분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책이란 과거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하는 말이며 지식을 보존하고 깨우침을 주는 역할도 있으나 작가만의 창조물이 아닌 독자들의 창조물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부분이었다. 보르헤스가 문학적으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준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책을 다 읽은 와중에도 머리를 싸매게 하는 책이었으나 좀 더 성장한 뒤에 책을 본다면 그때서야 새롭게 보이고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4. 블로그 주소를 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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